스란치마
의친왕의 5녀 이해경이 기증한 의친왕비(義親王妃, 1880~1964) 연안김씨가 착용하였던 스란(膝襴)치마이다. 이해경은 195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시집갈 때 입으라고 의친왕비가 주셨던 원삼을 비롯하여 두루마기 등 의친왕비가 주신 옷감으로 만든 옷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다. 3세부터 사동궁에서 의친왕비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여 누구보다도 황실의 법도를 직접 체험했다. 그가 기증한 의친왕가의 유물 중 이 스란치마와 의친왕비 당의, 원삼, 호리병 노리개, 화관, 궁녀용 대대 등 6건 7점은 2025년 2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겉감은 남색 바탕에 큰 꽃무늬가 있는 대화문단(大花紋緞)이고, 안감은 연보라색 자미사(紫薇紗)이며 소색(素色) 무명으로 치마허리를 달았다. 밑단에는 봉황문 금박을 찍은 부금 스란단을 부착하였다. 치마의 형태는 타 박물관 소장 스란치마에 비하여 폭이 3폭 반으로 좁고 안감도 짧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간소화된 형태로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여성의 치마는 예복용과 평상용으로 구분되는데, 예복용 스란치마는 왕실의 여성이나 품계가 높은 부녀자들이 관례(冠禮)·가례(嘉禮)·길례(吉禮)·절일(節日) 같은 행사 때 적의나 원삼, 당의 등 예복 차림에 갖추어 입었던 치마이다. 일반 사가에서는 혼례 때만 입었다. 스란치마는 평상용 치마보다 치마 길이가 길고 치마폭을 더해 주어 너비가 넓으며 치마의 무릎 부분과 밑단에 스란단을 대었다. 스란단을 장식하는 방법은 ㉠ 무늬를 금사(金絲)로 짜 넣거나, ㉡ 금박(金箔)을 직접 찍거나, ㉢ 금박을 찍은 스란을 덧대는 형태의 세 가지가 있다. 초기에는 동자문·봉황기린문·봉황문·화조문 등의 직금(織金) 스란을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용문·봉황문·수복화문 등의 부금(付金) 스란 형태로 변화하였다. 스란치마의 색상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발기(件記)」 등에 청색·남색·다홍색·자적색·양남 등으로 기록되었다. 스란단에 관한 명칭에는 쌍스란·스란·대란이 있고, 스란단은 한 단짜리와 두 단짜리가 있다. 17세기 이전에는 스란단 두 단을 치마의 무릎 부분에 댄 쌍스란(膝襴)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스란단이 치마 하단으로 이동하면서 한 단일 경우 스란(膝襴)이라고 하고, 치마의 무릎과 하단에 각각 한 단씩 두 단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대란(大襴)이라고 불렀다. 스란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1504년, 연산군 10)에 “동자포도쌍슬란(童子葡萄雙膝襴)과 연변(蓮邊)에 니금(泥金)으로 그린 치마감 9폭을 대궐로 들이라.”라는 내용에서 보인다. 후기 기록으로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1841년)에 시집갈 때 성대히 꾸미는 것 중에 스란치마[膝襴裙]라는 것이 있는데, 그 길이가 안에 입은 치마[裏裙]보다 조금 짧아서 무릎 아래에서 그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 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물 자료는 홑치마와 겹치마가 모두 있는데, 연화문단(蓮花紋緞), 모란문단(牧丹紋緞), 화문단(花紋緞), 문사(紋紗) 등의 직물을 사용하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청주 한씨(1500년대 후반) 연화문단 포도동자문 스란치마,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행주 기씨(1600년대) 포도동자문 스란치마, 경기도박물관 소장 성산 이씨(1651~1671) 봉황문 스란치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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